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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요한 황홀… 다시 그의 맑음에 항복한다"
함민복의 시를 통과하면 슬픔에도 빛이 어린다
선한 마음과 따뜻한 서정의 언어로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한 이면과 소외된 삶의 풍경을 노래해온 함민복 시인의 신작 시집 『물빛인쇄소』가 출간되었다. 전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 2013) 이후 13년 만에 선보이는 여섯번째 시집으로, 강화도 갯벌에서 길어 올린 낮고 겸허한 언어는 여전하되 사유의 반경은 한층 넓어졌다. 인간과 자연의 교감에서 출발한 시선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지나, 저마다 자신의 방향만이 옳다고 외치는 갈등과 대립의 시대를 향한 통찰로 뻗어 나간다. 추천사를 쓴 이대흠 시인은 이 시집이 선사하는 감흥을 “고요한 황홀”이라 이름 붙이며 “다시 그의 맑음에 항복한다”고 썼다. 전진만을 종용하는 속도의 시대에 사소한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생의 이치를 발견하는 이 투명한 시편들은 독자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 표지가 되어줄 것이다.
"마음에 마음이 새겨지길 바라는 일"
물빛으로 서로를 인쇄하는 생명들
이 시집의 제목 ‘물빛인쇄소’는 제 몸을 구부려 빛을 출력하는 바다의 이미지에서 왔다. 인쇄소에서 종이에 글자를 새기듯 바다가 수면에 빛을 새긴다면, 시인은 자연 가까이서 마음에 마음이 새겨지는 순간들을 시로 받아 적는다. 오랜 세월 강화도에 터를 잡고 살아온 그에게 자연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소통하고 교감하는 이웃이다. 교감은 기다림에서 시작된다. 시인은 “붓 모양 수천개의 꽃눈”이 달린 목련나무 앞에서 성급히 “꽃 핀 자화상”을 그리는 대신 “붓에 향이 차오를 때까지”(「목련나무」) 기다리고, 산림조합에서 “산수유 한그루 사놓고/집에 먼저 와”(「산수유」) 난생처음 나무를 기다려본다.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는 이 신실한 태도는 곧 배움으로 이어진다. 하루 산책을 걸렀다고 토라진 개에게 악수를 가르치려던 시인은 “세상 모두와 악수를 나누고 싶어/이리 온몸에 손을 달고”(「악수」) 있는 단풍나무 앞에서 겸연쩍어지며, 가르치려던 자리에서 도리어 배우는 자가 된다. 이처럼 “거의 다르고/조금 같은//조금 다르고/거의 같은”(「물빛인쇄소 2」) 생명들이 서로를 물들이며 살아가는 공존의 풍경이야말로 물빛인쇄소가 찍어내는 인쇄물이다.
죽음을 응시할수록 또렷해지는 삶의 윤곽
이번 시집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통찰이다. 심장 시술을 앞두고 “마지막 인사말도 써놓고”(「왕관」)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시인에게 죽음은 더이상 삶 바깥의 사건이 아니다. 일상 곳곳에서 죽음은 삶의 또다른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다. 쉼표와 마침표가 구별되지 않는 노안은 죽음이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노안」)라는 훈수를 건네고, 베어버리려다 그냥 둔 죽은 나무는 “잠시 머물러 있음인/삶을 비춰주는 죽음 한그루”(「죽은 나무」)로 마당에 서 있다. 이러한 사유는 죽음이 “삶을 조여주고” “균형을 잡아준다”(「공구함」)는 역설로 모인다. 죽음은 삶의 군더더기를 깎아내는 연장이 되어 오히려 살아 있는 시간의 의미를 선명하게 벼려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도달한 자리에서 삶과 죽음은 “삶 속으로 죽음이, 죽음 속으로 삶이/쏟아지게, 수없이 뒤집어보게 설계된” 모래시계이자 “끝나지 않는 키스”(「삶과 죽음은 모래시계, 끝나지 않는 키스」), 곧 서로 맞물려 끊임없이 순환하는 하나의 운동이 된다.
목차
제1부 꽃은 이별의 한복판
목련나무
허공을 받들며
산수유
또 봄
부러운 울음소리
병뚜껑이 나를 연다
KTX 역방향을 타고 가며
황링에서
종이 상자 시론(詩論)
정족산(鼎足山)
물빛인쇄소
엘리베이터 저울
악수
버스에서
비
연못
섬과 뭍
제2부 잘 봐, 우리들 춤이 무엇을 닮았는지
바람 인형
십자가의 길
나는 AI이다
검은 개
제주행 비행기에서
명맥(名脈)
대곶면 사거리 과일 가게 앞에서
구래역 버스 정류장에서
비빔밥
달의 후회
지우개
달은 생각하지 마
방향에 대하여
막걸리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에서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
새로운 바위 위에서
손
바람 인형 2
제3부 삶과 죽음은 모래시계, 끝나지 않는 키스
노안
임종
거울들
비밀
천마를 찾아서
죽은 나무
꽃과 나
공구함
방향의 숲
삶과 죽음은 모래시계, 끝나지 않는 키스
커서
코비드 19
장미와 AI
광화문 광장에서
목화토금수
하늘길
집
양심
제4부 경계가 흐른다
달력
하늘 학교
광화문 촛불 바다
날개
움직이는 십자가
공감에 대하여
하현(下絃)달
물경계
지하철에서
모시조개
독상
V자
그물의 시대
돋보기
왕관
물빛인쇄소 2
무심(無心)
해설|송현지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