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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자기결정권을 되찾는 출발선, 바운더리
상담실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착하게’ 살아서 늘 상처받는다며 하소연하지만 실은 희미한 자아를 지닌 채 채워지지 않는 기대를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 자신은 관계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며 분개하지만 알고 보면 바랄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바라며 상대를 압박하는 사람, 두려움과 과잉책임감, 죄책감 등으로 만들어진 감정의 사슬에 묶인 채 서로 조종하고 조종받는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의 문제는 다양해 보이지만 결국 모두 하나의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바로, ‘바운더리’가 건강하게 세워지지 못했고, 그로 인해 ‘자아’와 ‘관계’가 균형을 잃었다는 것이다.
바운더리는 사람이 태어나 어린 시절 양육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개별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건강한 바운더리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중 하나가 ‘애착’이다. 최근 심리서나 육아서에는 ‘애착’ 개념이 상당히 비중 있게 등장하다 보니 ‘안정적 애착이란 애착손상을 피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사곤 한다. 하지만 애착은 손상을 주지 않는 것보다 ‘복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안정 애착’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부터가 관계의 틀을 재구성해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첫걸음이다.
도대체 그 사람은 왜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을까?
일그러진 관계의 틀: 순응형, 돌봄형, 지배형, 방어형
바운더리란 인간관계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해주는 자아의 경계이자 관계 교류가 일어나는 통로다. 자아의 진짜 모습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바운더리라는 형태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렇다 보니 왜곡된 바운더리는 필연적으로 역기능적 관계를 낳는다.
바운더리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크게 두 갈래다. 주로 애착손상으로 인해 1)자아발달에 문제가 생기거나, 2)인간관계의 교류에 왜곡이 일어난다. 자아발달의 왜곡(미분화, 과분화)과 관계교류의 왜곡(억제형, 탈억제형)이라는 두 변인을 따라 순응형 · 돌봄형 · 지배형 · 방어형이라는 4가지 역기능적 관계틀이 등장한다. 이 책의 2부에서는 각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정서적 특징과 더불어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또 살아가면서 주로 어떤 문제들을 맞닥뜨리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관계 때문에 힘들어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모습 속에서 이런 역기능적 유형 중 하나 이상을 발견할 것이다. 자신의 관계틀/관계유형을 알아보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다만 이 관계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누구와 관계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으며, 한 관계에서 주된 유형과 함께 부수적인 유형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일그러진 관계틀을 깨고 건강한 관계와 자기세계를 되찾으려면 다시 ‘바운더리’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바운더리, 건강하게 다시 세울 수 있을까?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바운더리의 재구성
건강한 바운더리라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 책의 3부에서는 바운더리가 건강함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주는 ‘관계의 자원’ 영역을 이루는 다섯 가지 역량으로 관계조절력, 상호존중감,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 갈등회복력, 솔직한 자기표현을 제시한다. 《관계를 읽는 시간》에서는 이 역량들을 키워 바운더리를 건강하게 다시 세우기 위해 우리가 직접 실천해볼 수 있는 ‘관계 연습’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 바운더리를 다시 세우는 관계 연습 ★
하나. 먼저 내 관계의 역사를 이해하기
둘. 손상 회피보다 복구가 중요하다. 애착손상 치유 연습
셋, 자기표현 훈련 P.A.C.E.로 바운더리 세워보기
넷, 작은 것부터 결정권을 찾아오는 ‘아니오’ 연습
다섯, 내가 있어야 관계도 있다. ‘자기세계’ 만들기
이 책의 부제는 ‘나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바운더리의 심리학’이다. 관계에서 번번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나의 관계틀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관계에서 ‘자기결정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관계에서든 “자신을 돌보면서 상대와 친해지고, 당신이 당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것처럼 상대를 상대의 모습대로 살아가도록 존중하고, 갈등을 피하기보다 갈등을 풀어갈 줄 알고, 상대를 염두에 두되 원치 않는 것은 거절하고 원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바운더리를 제대로 세운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도, 폐쇄적인 것도 아니다. 솔깃하게 들리는 요즘 트렌드처럼 상처받지 않기 위해 늘 거리를 두겠다는 결심과도 다르다. 바운더리가 건강하면 관계는 내 편이 된다. 관계에 따르는 경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고 자기표현이 가능한 관계를 회복할 때 우리는 진짜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를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