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duct Overview
각 장은 엄마를 찾아 헤매는 자식들과 남편, 그리고 엄마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딸, 아들, 남편으로 관점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펼쳐질 때마다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각자가 간직한, 그러나 서로가 잘 모르거나 무심코 무시했던 엄마의 인생과 가족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외딴방]의 문학적 의미와 가치는 다양한 각도에서 성찰될 수 있겠지만 우선 작가 개인의 이력과 관련하여 이 작품이 '신경숙 문학의 또다른 시원'을 밝혀주는 중요한 이정표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시선을 모은다.
[외딴방] 이전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신경숙 문학의 밑자리는 거센 도시화와 산업화의 밀물에 밀려 점차 쇠락과 소멸의 길을 걷고 있는 농촌 공동체의 다사롭고 넉넉한 품이었다.(그것의 가장 극명한 표현이 첫 장편 '깊은 슬픔'에 나오는 이슬어지라는 환상적 아름다움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유년 시절의 체험과 긴밀하게 맞물린 그 공간은 대도시의 번잡하고 이기적인 삶의 방식과 대비되어 한편으로 아련한 향수와 동경을, 다른 한편으로 애절한 정서적 울림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신경숙의 언어의 연금술에 도취된 나머지 그녀의 농촌체험과 성년의 도시체험 사이에 어떤 단절 혹은 공백이 가로놓여 있다는 점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체험이 은밀히 숨겨져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외딴방]이 우리 앞에 선을 보이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신경숙이 그토록 드러내놓길 꺼렸왔던, 그러나 언젠가는 기필코 말해야만 했던 유년과 성년 사이의 공백기간, 열여섯에서 스무 살까지의 그 시간의 빈터 속으로 입장할 수 있게 되었다.
[외딴방]을 통해서야 우리는 신경숙 문학의 또다른 시원, 그 아프고 잔인했던 시절,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문학에의 꿈을 키워나가던 소녀 신경숙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작가의 자폐적 기질, 아름다움에 대한 끝없는 동경, 삶의 속절없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요히 수납하는 태도 등이 어디서 발원했는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펼쳐들어야 한다.
생성중인 소설, 현재진행형의 글쓰기의 한 전범
이 작품의 메타픽션적인 구성 방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말을 할 수 있다.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작품의 전면에 등장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이 작가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기법에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내적 필연성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필연성은 다른 말로 작가의 진정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작가는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취한 채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야기에 개입해 들어가서 그 의미를 반추하고 그것의 필연성과 정당성에 질문을 던진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작가의 머릿속에서 완료된 상태로 있다가 지면 위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글쓰기에 의해 계속 다른 의미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즉 그녀의 이번 소설은 생성중인 소설, 현재진행형의 글쓰기의 한 전범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글쓰기는 이 작품에 강한 밀도와 구체성을 부여해주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하여 우리는 이 작품에서 한 작가의 불우했던 지난 시절에 대한 평면적인 고백이나 미화된 과거 한 시절의 추억담이 아니라 운명의 호출 앞에서 존재증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허여된 유일한 방식인 글쓰기를 통해 온힘을 다해 싸우는 한 영혼의 초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외딴방]에서도 작가는 사위어가는 노을처럼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의 슬프고도 적요한 운명을 단정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것은 시간의 심연 속으로의 여행인 동시에 들끓는 감정을 냉각된 문체로 옮겨놓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녀는 기억의 퇴적층 속에 파묻힌 과거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재발굴하고 거기에 아름다운 시적 후광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