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duct Overview
2008년부터 6개월간 온라인서점 예스24 블로그에 연재되었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발표 초기부터 ‘박민규의 색다른 연애소설’로 회자되며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못생긴 여자와 그런 그녀를 사랑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20대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작가 스스로 ‘80년대 빈티지 신파’라 일컬을 만큼 내용이나 스타일에서 큰 변화를 선보였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의 서울을 무대로 한 이 소설엔 평범한 인간관계가 어려울 정도로 못생긴 여자와, 잘생기고 번듯하지만 부모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를 공유한 두 명의 청년이 등장한다. 백화점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만난 이들 세 사람은 서로의 결핍과 아픔을 거울처럼 비추며 조심스럽게 가까워진다. 상처받은 인간의 내면에 그 어느 작품보다 깊이 파고드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부조리와 편견 가득한 사회의 장벽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무참히 사회의 바깥으로 추방당했던 우리 모두의 첫사랑의 기억을 들추어낸다.
“그럴듯한 것은 결코 그런, 것이 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칼날로 벗겨낸 삶의 허상들
온 세상이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데뷔곡 「Baby One More Time」으로 가득하던 1999년의 겨울, 34세의 성공한 작가인 ‘나’는 언제나처럼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듣고 있다. 그리고 잊지 못할 단 한 명의 여인을 추억한다. 오래전 두 사람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고, 여자는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선물했다. 우연찮게도 그날 두 사람이 함께했던 카페엔 벨라스케스의 그림 「라스메니나스」가 걸려 있었는데, 모리스 라벨은 그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만들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 시녀는 오랫동안 ‘나’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게 된다.
‘나’의 아버지는 뒤늦게 인기 배우가 된 잘생긴 남자였고, 어머니는 그런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못생긴 여자였다. 성공을 거머쥐자 아버지는 결국 가족을 떠나고, 어머니는 슬픔과 절망 속에 삶을 이어간다. 1986년의 그때 ‘나’의 나이는 스무 살. 온 나라가 경제성장의 가속도를 타고 부를 향해 미친 듯이 노력하던 그 시절, ‘나’는 자본주의의 최전선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생의 중요한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민감하고 연약했던 청춘의 시기에 정신적 스승이 되어준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 누구도 쳐다보기 싫어하던 못생긴 그녀. 둘은 서로 사랑했고, 즐거웠으며, 늘 함께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녀는 외모로 인한 사회적 소수자의 상처를 입고 ‘나’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요한도 가족에 대한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머나먼 요양소로 떠나버린다. 세월이 흐르고 소설가로 성공한 ‘나’는 수소문 끝에 그녀가 독일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데...
외모 이데올로기에 대한 야심 찬 반격!
“우리는 모두 죽은 왕녀 곁에 들러리 선 시녀와 마찬가지였다.”
표제이기도 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죽은 ‘왕녀’ 곁에 선 ‘시녀’가 상징하는 것은 비단 주인공의 못생긴 연인만이 아니다. 그것은 80년대에 대한 추억 그 자체다. 그것은 록음악이기도 했고, 소설이기도 했으며, 늘 성공을 꿈꾸던 우리네 서민들의 삶 자체이기도 했다. 마돈나, 마이클 잭슨, 할리우드의 온갖 삼류영화들 틈바구니에서 문득 자신들의 비루한 삶에 눈물을 삼키곤 했던, 그래서 예뻐지고 싶고, 부유해지고 싶고, 세련되고 싶었던 지나간 우리의 모습들이다. KFC가 등장하기 전 시장 골목 어귀마다 서 있던 켄터키 치킨집과, ‘HOPE’라 적힌 간판 아래서 희망을 안주 삼던 변두리 호프집, 백화점의 죠다쉬와 나이키, 자가용을 욕망하던 촌스럽고 시시했던 그 모든 시절이 바로 죽은 왕녀 곁에 선 시녀를 떠올리게 한다. 모리스 라벨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작곡했듯, 박민규는 죽은 왕녀 곁에 들러리 선 시녀의 모습에서 부와 권력의 시스템 안에 농락당한 애처로운 절대다수의 그림자를 발견해낸 셈이다.
따라서 죽은 ‘왕녀’는 절대다수가 신봉해온 자본주의의 꽃인 부와 아름다움이 된다. 사실 그 꽃은 소수의 권력자가 자신들의 지위와 부를 유지하기 위해 설정해놓은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다수인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꽃을 찬탄하며 부러워한다. 그래서 주인공인 ‘나’는 이미 달콤한 성공의 꽃을 찾아 가족의 삶을 유기해버린 아버지에게서 상처를 받은 바, 실체를 알 수 없는 꽃들의 향기에 염증을 느끼고 오히려 못생긴 ‘그녀’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토대를 발견한다. 박민규의 소설에서 예외 없이 발견되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주류·비주류의 역학관계에 대한 비판의식이 이번엔 ‘외모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하고 있는 여성의 입장을 새롭게 재조명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