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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를 소개한 앞선 두 권의 책 《한 줄도 너무 길다》와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에는 하이쿠의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마쓰오 바쇼의 작품만을 깊이 있게 다룬 이 선집은 '하이쿠를 읽기 위해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한' 류시화 시인의 오랜 노력의 결정체로, 바쇼의 삶과 방랑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가 지은 1,100편의 하이쿠 중 대표작 350편을 해설과 함께 실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저자 : 마츠오 바쇼
저자 마츠오 바쇼는하이쿠의 완성자이며 하이쿠의 성인이라 불리는 마쓰오 바쇼는 에도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1644년 일본 남동부 교토 부근의 이가우에노에서 하급 무사 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쓰오 무네후사이고, 어렸을 때 이름은 긴사쿠였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자 곤궁한 살림으로 인해 바쇼는 열아홉 살에 지역의 권세 있는 무사 집에 들어가 그 집 아들 요시타다를 시봉하며 지냈다. 두 살 연상인 요시타다는 하이쿠에 취미가 있어서 교토의 하이쿠 지도자 기타무라 기긴에게 사사하는 중이었다. 친동생처럼 요시타다의 총애를 받은 바쇼도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하이쿠의 세계를 접하고 기긴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요시타다가 25세에 갑자기 병사하자 충격을 받은 바쇼는 고향을 떠나 교토로 갔다. 이후 20대 후반까지의 행적은 밝혀진 바가 없다. 교토의 절에 머물며 불교 공부와 참선 수행을 했다는 설도 있다.
31세에 바쇼는 스승 기긴에게서 하이쿠 작법서를 전수받음으로써 독립된 하이쿠 지도자가 될 자격을 인정받았으며, 이해에 교토 생활을 접고 걸어서 지금의 도쿄인 에도로 향했다. 에도의 번화가 니혼바시에 도착한 그는 상점의 서기 일을 하거나 다른 시인의 하이쿠 문집을 필사해 주며 생계를 이었다. 에도 시내의 상수도 공사장에서 4년간 일하기도 했다. 이 사이에 하이쿠 습작생들이 하나둘 그의 밑에 모이기 시작했다. 언어유희에 치우친 기존의 하이쿠에서 탈피해 문학적인 하이쿠를 갈망하던 이들이 바쇼에게서 진정한 하이쿠 시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산푸, 기카쿠, 란세쓰, 보쿠세키, 란란 등 수십 명의 뛰어난 젊은 시인들이 바쇼의 문하생으로 모임으로써 에도의 하이쿠 문단은 일대 전기를 맞이했다. 이 무렵 시가 궁정의 귀족들 사이를 떠나 무사와 상인들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에 바쇼의 문하생들은 다양했다. 왕실의 일원이나 의사들도 있었으며, 전직 무사, 화가, 쌀장수, 감옥에 갇혔다 나온 이들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하이쿠 지도자의 삶을 시작한 바쇼는 에도의 하이쿠 문단에서 나날이 명성이 높아 갔다. 부유한 문하생들의 후원으로 더 이상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고, 문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었다. 서른일곱 살에 '옹'이라는 경칭을 들을 정도로 하이쿠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누렸다.
그러나 37세에 바쇼는 돌연 모든 지위와 명예를 내려놓고 한겨울에 에도 접경을 흐르는 스미다가와 강 건너 후카가와의 작은 오두막으로 은둔해 들어갔다. 그곳은 해수면과 높이가 같은 저지대로 도쿄 만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거친 물결에 노출된 지역이었다. 심한 태풍이 불 때는 대피해야 하고, 식수도 배로 실어다 주는 물에 의지하는 거칠고 척박한 땅이었다. 성공의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변두리로 은둔해 들어간 것은 하이쿠 지도자로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문하생 한 명이 파초 한 포기를 마당에 선물함으로써 오두막은 '파초암(바쇼안)'으로 불리게 되었고, 바람에 잘 꺾이는 파초를 무척 사랑해 바쇼는 자신의 호를 그때까지의 '도세이'에서 '바쇼(파초)'로 바꾸었다. 해학의 재치와 능란한 언어유희를 겨루는 작품들만 인기가 높던 시대에 바쇼가 목표로 한 것은 정적 속에서 느껴지는 감성, 인생의 고독과 허무,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시 속에 담는 일이었다. 웃음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탐구하는 시였다. 그래서 에도의 번화가를 떠나 오직 진정한 문학에 대한 갈구만을 가슴에 품고 파초암으로 들어간 것이다. 다른 하이쿠 지도자들의 눈에는 ‘패배’로 보였지만 바쇼의 문하생들은 후카가와로의 이사를 크게 환영하며 힘을 합쳐 스승의 생활을 지원했다. 바쇼가 문하생들로부터 존경받은 것은 단순히 시적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스승으로서의 실천적 자세 때문이었다. 이 무렵 오니쓰라, 라이잔, 신토쿠, 곤스이 등 뛰어난 시인들이 바쇼의 새로운 하이쿠 운동에 합류했다. 그리하여 바쇼를 통해 본격적인 하이쿠 문학이 탄생하고, 단순한 경구나 번뜩이는 재치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에 깃들인 깊은 시상을 17자의 제한된 형식 안에 응축해 표현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문학에서 바쇼는 '방랑 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의 근본 사상은 안주의 거부였다. 문하생들의 후원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 한적한 거처를 마련하고 시인으로서의 명성도 얻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이 불행으로 작용했다. 화재로 전소된 첫 번째 파초암 자리에 두 번째 파초암이 지어졌을 때가 40세, 그 이듬해부터 바쇼는 오두막을 거점으로 '인생은 곧 여행'이라는 사상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방랑은 생을 마칠 때까지 10년 동안 수천 킬로미터나 반복되었으며, 이 기간에 대표 하이쿠 대부분이 탄생했다. 41세의 가을, 바쇼는 은둔 생활을 박차고 방랑에 나섰다. 42세 여름까지 아홉 달이나 걸린 긴 도보 여행이었다. 이 여행의 핵심만을 기록한 짧은 기행문이 『노자라시 기행』이다. ‘노자라시’, 즉 ‘들판에 버려진 해골’이라고 제목이 붙은 까닭은 여행기 서두에 실린 하이쿠에 있다. '들판의 해골 되리라/ 마음먹으니/ 몸에 스미는 바람'. 44세의 늦가을에 바쇼는 또다시 6개월 동안의 『오이노코부미』 여행을 떠났다. 이제 바쇼의 이름은 일본 전역에 알려졌고, 가는 곳마다 문인들과 습작생들이 모여 그를 중심으로 하이쿠 모임을 열었다. 그리고 46세의 봄, 바쇼는 또다시 긴 방랑을 계획했다. 오쿠, 즉 일본 동북부의 깊숙한 지역들을 도는 대장정이었다. 지난번 여행들에서 가 보지 않은 내륙 오지들을 가기로 한 것이다. 바쇼를 바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여행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400킬로미터에 이르는 150일간의 여정을 기록한 『오쿠노호소미치』는 일본 기행문학의 꽃이라 일컬어지며 바쇼의 저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시와 마음의 여정 『오쿠노호소미치』 여행은 바쇼의 문학 인생의 정점이었다. 여러 대표 시가 이 여행 중에 탄생했으며, 자연과 합일된 순간들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건강은 나빠졌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속세의 소유와 이름을 버리고 운명을 바람에 맡긴 채 출가자처럼 떠돈 방랑이었다. 여행을 마친 바쇼는 고향과 교토 부근의 여러 장소에서 여행기를 수정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행의 구체적인 기록이 아니라 시와 산문이 어우러진 독특한 장르의 탄생이었다. 여행기에 실린 하이쿠들은 5·7·5 열일곱 자의 하이쿠가 독립된 시로 훌륭하게 자리 잡는 역사적인 출발이 되었다. 교토 부근의 여러 장소를 전전하던 바쇼는 여행을 떠난 2년 후인 48세의 겨울, 에도로 돌아왔다. 이 무렵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문하생들의 세력 다툼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으로 지친 그는 오두막 문을 닫아걸고 한동안 세상과 절연했다. 51세의 여름, 다시 오두막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 바쇼는 여행 도중 오사카의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생전에 좋아하던 비와코 호수 부근의 절 기추지 마당에 묻혔다
역자: 류시화(본명:안재찬)
시인이자 명상가.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바 있다. 1980~1982년까지 박덕규, 이문재, 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으나 1983~1990년에는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구도의 길을 떠났다. 이 기간 동안 명상서적 번역 작업을 했다. 이때 『성자가 된 청소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티벳 사자의 서』, 『장자, 도를 말하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등 명상과 인간의식 진화에 대한 주요 서적 40여 권을 번역하였다. 1988년 '요가난다 명상센터' 등 미국 캘리포니아의 여러 명상센터를 체험하고, 『성자가 된 청소부』의 저자 바바 하리 다스와 만나게 된다. 1988년부터 열 차례에 걸쳐 인도를 여행하며, 라즈니쉬 명상센터에서 생활해왔다.그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1989년~1998년 동안 21번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시인은 「시로 여는 세상」 2002년 여름호에서 대학생 53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에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과 함께 이름을 올렸으며 명지대 김재윤 교수의 논문 설문조사에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 10위, 21세기 주목해야할 시인 1위, 평소에 좋아하는 시인으로는 윤동주시인 다음으로 지목된다. 저작권 협회의 집계 기준으로 류시화 시인의 시는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낭송되는 시로 손꼽히기도 한다.
류시화 시인의 작품은 문단과 문예지에도 외면을 당하기도 했는데 안재찬으로 활동했을 당시, 민중적이고 저항적 작품을 지향했던 당대의 문단과는 달리 신비주의적 세계관의 작품세계로 인해 문단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외계인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민중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당시의 문단에서 현실 도피의 소지를 제공한다며 비난을 받았으며 대중의 심리에 부응하고 세속적 욕망에 맞춰 작품이 창작되었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 이문재씨는 류시화의 시가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고 초기의 시세계를 유지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20여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을 지키며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큰 변화 못지 않은 견딤이라 평가하기도 하였다. 류시화의 시는 일상 언어들을 사용해 신비한 세계를 빚어내어, 걸림없이 마음에 걸어들어오면서 결코 쉽고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무게로 삶을 잡아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낯익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낯설음의 세계를 재발견하는 시세계를 한껏 선사해왔다.
그의 대표작인『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는 한층 깊어진 눈빛을 지닌 시세계가 곱씹히고 곱씹힌다. 류시화는 가타 명상센터, 제주도 서귀포 등에서 지내며 네팔, 티벳, 스리랑카, 인도 등을 여행하며 그가 꿈꿔왔던 자유의 본질 그리고 꺠달음에 관한 사색과 명상들이 가득한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실소를 자아내는 일화들 속에서, 그렇지만 그냥 흘려버리기엔 너무 무거운 이야기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을 냈으며,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엮었다. 인도 여행기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를 펴냈으며, 하이쿠 모음집 『한 줄도 너무 길다』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바쇼 하이쿠 선집』과 인디언 연설문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엮었다. 번역서 『인생 수업』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기탄잘리』 『예언자』 등이 있다. 2017년 산문집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