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duct Overview
《서왕모의 강림》은 꾸준히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을 따라온 독자들이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또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중요한 작품이다. 혹은 크러스너호르커이와 가까워지고 싶었으나 선뜻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던 독자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총 1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서왕모의 강림》은 비교적 우리에게 친숙한 장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다수 실려 있다. 현대 일본의 교토나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같은 곳이 그 예다. 한번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면 다시 집중하기 어려운 장편과는 다르게 한 편, 한 편의 끝맺음이 있다는 것 역시 진입 장벽을 낮추는 주요한 요인이다.
동시에 《서왕모의 강림》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학적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찍이 크러스너호르커이가 “마침표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 속한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그의 작품을 처음 읽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끝나지 않는 문장, 끊임없이 등장하는 쉼표에 당혹스러워질 수 있다. 《서왕모의 강림》 역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스타일이 여실히 살아 있다. 그러나 차분히 활자를 따라 읽어가다 보면 마치 롱테이크로 찍은 영화를 보는 듯 눈앞에서 생생히 펼쳐지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문장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문학적 순간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서왕모의 강림》에 실린 17편의 작품은 저마다 다른 주제를 선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꼽아보자면 넓은 의미에서의 ‘예술’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작품에 최소 한 가지 이상의 예술 작품이 등장한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회화 작품이거나, 불상,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이기도 하고, 일본의 전통 가면극이거나 혹은 제례 의식 그 자체일 수 있다. 《서왕모의 강림》은 인간이 아닌 예술 그 자체가 주인공인 작품집이며, 그렇기 때문에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들 속에서 특별한 위치에 자리한다.
* 수록작 소개 *
<가모가와의 사냥꾼>
교토 가모가와강에 백로 한 마리가 앉아 물고기를 사냥하고 있다. 백로는 숭고한 존재이나 그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람은 화자뿐이다. 강둑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도 가모가와강에서 사냥하는 새 한 마리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추방당한 왕후>
바사(페르시아)의 왕후 와스디가 아하수에로왕의 명령을 거역하여 추방당했다는 짧은 일화를 르네상스 화가 필리피노 리피의 작품과 접목하여 비극적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불상의 보전>
일본 아이치현 이나자와시에 있는 젠겐지에서 아미타여래좌상을 복원하는 과정 전반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상을 옮겨 복원청으로 가져가고 복원을 완료하며 개안식(복원된 불상을 돌려받아 모시고 눈을 그리는 의식)을 묘사한다.
<크리스토 모르토>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방문한 주인공은 11년 전 단체 관광객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 신비스럽게 조우한 그림을 다시 보려고 산 로코 미술관을 찾는다.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서>
평생 꿈꿔온 아크로폴리스 관람을 위해 아테네를 찾은 관광객 주인공은 공항의 혼잡과 택시 기사의 바가지에 시달리고 나서 친절한 청년들과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그들의 만류에도 아크로폴리스를 향해 출발한다.
<그는 새벽에 일어난다>
노멘(일본 전통 연극 노의 가면)을 제작하는 장인이 가면 하나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히 묘사한다. 금욕적으로 생활하며 오직 귀신 가면 만들기에 열중하던 장인이 마지막 손길을 더했을 때, 그 가면에서 귀신이 태어난다.
<살인자의 탄생>
평범한 생활에 신물이 나 무작정 무일푼으로 고국을 떠나온 남자는 카사 밀라라는 건물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러시아 성화 전시회를 보게 된다. 그는 그곳을 지키던 경비원에게서 일방적으로 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노우에 가즈유키 명인의 삶과 일>
일본 전통 연극인 노 <서왕모>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이노우에 가즈유키 명인의 기구한 내력과 독특한 정신 세계를 묘사한다.
<일 리토르노 인 페루자>
피에트로 페루지노(이하 ‘마에스트로’)는 페루자 출신의 화가로, 공방 제자들과 함께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다 피렌체에 정착했으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다시 짐을 꾸려 페루자로 돌아간다. 제자 네 명은 수레에 짐을 싣고 따로 출발하는데, 포도주에 취해 곯아떨어지는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다.
<아득한 명령>
알람브라 궁전은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언제 건축되었는지, 누가 건축을 의뢰했는지, 무엇을 위한 건축물인지 등등 무엇 하나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무언가 밖에서 불타고 있다>
루마니아 스픈타 아나 호수의 캠프장에 예술가 열두 명이 모여든다. 그들이 자연을 체험하고 명상하면서 각자 예술 활동을 하는 동안 부쿠레슈티에서 온 남자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남들을 구경하기만 한다. 그는 일정 시간 동안 종적을 감추는데, 몇 사람이 새벽에 일어나 그의 뒤를 밟는다.
<당신이 바라보고 있을 곳>
루브르 박물관에서 32년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세바뉴의 유일한 낙은 자신이 맡은 전시실에 놓인 밀로의 비너스를 바라보는 것이다.
<사적인 열정>
도시에서 온 건축가는 도서관 강연회에 모여서 바로크 음악에 대해 열정적인 사변을 늘어놓는다. 바로크는 고통의 예술이요 죽음의 예술이며 모든 것은 바로크와 함께 끝났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건축가는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청중착오적이기도 해서 강연회에 참석한 노인들은 그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
<푸르름 속 메마른 띠 하나뿐>
풍경화가 킨츨은 연인 오귀스틴이 죽은 뒤 제네바에서 로잔으로 가는 열차 승차권을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그는 자신을 훔쳐보는 사람들과 발권에 늑장을 부리는 역무원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는 얼마 전 제네바 호수를 묘사한 풍경화를 완성했으나 제목을 붙이지 못했는데, 매표구 앞에 도달해서야 올바른 제목이 떠오른다.
<이세신궁 식년천궁>
이세신궁은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의식주의 신 도요우케노 오미카미를 모시는 신사로, 일본 미에현 이세시에 있다. 이 이야기는 이곳의 신사 건물을 20년마다 새로 짓는 식년천궁 의식을 소재로 한다. 서양인 관광객과 일본인 친구는 제62회 이세신궁 식년천궁에 참관하기 위해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다.
<제아미는 떠난다>
제아미는 노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정착시킨 인물이다. 이 이야기는 제아미가 권력의 눈밖에 나 사도섬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죽기까지의 기간을 다루는데, 이곳에서 제아미는 마지막 작품 《긴토쇼》를 남긴다.
<땅밑에서 들려오는 비명>
상 왕조 사람들은 불가침의 무덤을 짓고자 했으나, 현재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그들이 상상한 시간의 척도를 훌쩍 뛰어넘기에 이제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덤을 지키던 짐승들의 비명만이 남아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Krasznahorkai László) 1954년 헝가리 줄러에서 태어났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고, 1987년 독일에 유학했다. 이후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그리스, 중국, 몽골, 일본,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에 매진해왔다.
헝가리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며 고골, 멜빌과 자주 비견되곤 한다. 수전 손택은 그를 “현존하는 묵시록 문학의 최고 거장”으로 일컫기도 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종말론적 성향에 대해 “아마도 나는 지옥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독자들을 위한 작가인 것 같다”라고 밝힌 바 있다. 영화감독 벨라 타르, 미술가 막스 뉴만과의 협업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확장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사탄탱고》(1985), 《저항의 멜랑콜리The Melancholy of Resistance》(1989), 《전쟁과 전쟁War and War》(1999), 《서왕모의 강림Seiobo There Below》(2008), 《마지막 늑대The Last Wolf》(2009), 《세상은 계속된다The World Goes On》(2013) 등이 있다.
그의 소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다양한 국내 및 국제 문학상을 수상했다. 헝가리의 Tibor Dery 문학상(1992), 독일의 SWR-Bestenliste 문학상(1993), 대문호 산도르 마라이의 이름을 따 제정한 헝가리의 Sandor Marai 문학상(1998), 헝가리 최고 권위 문학상인 Kossuth 문학상(2004), 스위스의 Spycher 문학상(2010), 독일의 Brucke Berlin 문학상(2010) 등을 받았고, 2015년에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수상했다. 2018년 《세상은 계속된다》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또 한 번 이름을 올렸다.
20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