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2019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The Goalie's Anxiety at the Penalty K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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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37462337
Condition: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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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 저자:
페터 한트케 저/윤용호 (옮김)
Publisher/ 출판사:
민음사
Release Date / 출판일:
2009.12.11
Page / 페이지:
138

Product Overview

 
현대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페터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다. 매년 가장 유력한 노벨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한트케는 보편적인 문학성에 반하는 실험적인 작품들로 항상 새로운 화두를 만들어 낸다. 한트케의 소설은 통상적으로 ‘줄거리 없는 소설’이라고 회자되는데, 이 작품은 한트케가 1970년대 들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통적인 서사를 회복하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한때 유명한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는 공사장 인부로 일하다 석연찮게 실직하고 방황하던 중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며 납득하기 힘든 언행을 일삼는 주인공 블로흐의 모습을 통해 소외와 단절의 현대 사회, 그 불안한 단면이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 한트케의 오랜 친구이자 영화계의 세계적인 거장인 빔 벤더스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며 만든 작품으로도 호평받았다.
 

저자 페터 한트케 (Peter Handke) 1942년 오스트리아 케른텐 주 그리펜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문화적으로 척박한 벽촌에서 보내며 일찍부터 전쟁과 궁핍을 경험했다. 그라츠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하다가 4학년 재학 중에 쓴 첫 소설 『말벌들』로 1966년에 등단했다. 그해 미국서 개최된 ‘47그룹’ 회합에 참석한 한트케는 당시 서독 문단을 주도했던 47그룹의 ‘참여문학’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면서 이목을 끌었다. 한국에서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실험적인 희곡 「관객 모독」도 같은 해에 출간되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내용보다 서술을 우선하는 실험적인 작품으로 다수의 혹평과 소수의 호평을 받다가 1970년대 들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통적인 서사를 회복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작품이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다. 독일어로 쓰인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이 작품은 1972년에 거장 빔 벤더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1967년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상, 1972년 페터 로제거 문학상, 1973년 실러 상 및 뷔히너 상, 1978년 조르주 사둘 상, 1979년 카프카 상, 1985년 잘츠부르크 문학상 및 프란츠 나블 상, 1987년 오스트리아 국가상 및 브레멘 문학상, 1995년 실러 기념상, 2001년 블라우어 살롱 상, 2004년 시그리드 운세트 상, 2006년 하인리히 하이네 상 등 많은 상을 석권했으며,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며 마침내 2019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트케에게 슬로베니아는 오늘날까지 써왔던 많은 작품들에서 중요한 문학적 토양이 되고 있다. 우선 소설로는 『말벌들』, 『소망없는 불행』, 『세계의 무게』, 『쌩뜨 빅뚜와르산의 교훈』, 『반복』(1986) 등이 있다. 특히 『소망없는 불행』에는 1971년에 51세의 나이로 자살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작품배경이 슬로베니아인, 『반복』은 1987년 슬로베니아 작가협회의 격찬(激讚)과 함께 빌레니카 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슬로베니아가 1991년에 자주국가로 유고슬라비아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이 될 때 한트케는 그의 모계에 “지나가버린 현실”로 이어져 오는 슬로베니아를 회상하면서 『꿈꾸었던 동경의 나라와 작별』(1991)을 썼다.

 

출판사 리뷰


정체성을 상실하고 소외된 현대인,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현대 사회

이전에 유명한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던 중 조금 늦게 출근한 자신을 흘끗 쳐다보는 현장감독의 눈빛을 해고 통지로 지레짐작하고 작업장을 떠난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느끼며 극장, 카페, 호텔 등을 무의미하게 전전한다. 그러던 중 얼굴을 익힌 극장의 매표원 아가씨를 쫓아가 함께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침 블로흐는 여자와의 대화에서 불쾌함을 느끼다가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하고 묻는 그녀를 목 졸라 살해한다. 경찰이 수사망을 좁혀 오자, 국경 마을로 달아난 블로흐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자기를 향한 어떤 상징이나 신호일 것이라는 강박에 시달린다.
주인공 블로흐의 모습은 매우 비상식적이다. 지각이라는 정황만 가지고 자신을 향한 눈빛을 덜컥 해고 통지로 받아들이고, 사실 여부도 끝내 확인하지 않는 그의 사고와 대응방식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배회하며 아무것도 아닌 일로 소동을 일으키고 쉽게 다툼에 휘말린다. 매표원 아가씨를 살해하는 동기도 불분명해 보인다. 그는 한때 외국으로 원정 경기를 다니며 팬들에게 사인 엽서를 부칠 만큼 유명한 골키퍼였지만, 지금은 공사장에서 이름 없는 인부로 일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경기를 보면서도 관중 속에 휩쓸리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유명 선수였던 과거의 자신과 무명 노동자인 현재의 자신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상행동은 자기 정체성의 상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장감독의 눈빛을 해고 통지로 받아들인 것도 타인의 시선에 예민한 그의 과잉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사장을 나온 그는 대낮의 화창한 거리에서 불안을 느끼며 어두운 극장, 카페로 숨어든다. 친구들과의 통화도 사람들과의 대화도 실패한다. 누구도 그의 존재를 규명해 주지 못한다. 블로흐가 여자를 살해한 것은 일하러 가지 않느냐는 그녀의 한마디가 제자리를 잃은 그의 불안을 정확히 꿰뚫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타인에 의해 자신이 규정되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이 느끼는 불안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불러올 만큼 파괴적이다.
블로흐는 누구와도 정상적인 대화를 하지 못한다. 그는 공중전화가 보일 때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지만, 친구들과의 통화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처는 통화 내내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사람들과 나누는 모든 대화는 농담으로 치부되거나 엉뚱하게 곡해된다. 블로흐가 매표원 아가씨와의 대화에서 불쾌함을 느낀 것도 그녀가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짐작으로 넘겨 버리고 그와 무관한 자기 얘기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말을 하면 상대에게 의미가 전달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이 빛을 반사하듯 튕겨져 나오거나 맥락 없이 뒤엉켜 다른 곳으로 흘러가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블로흐는 뮤직 박스의 음악이나 켜 놓고 보지 않는 텔레비전 소리같이 무의미한 기계음에서 안정을 느낀다. 자기 존재와 소통 방식을 잃은 ‘상실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의미 없는 대화를 계속할수록 더 큰 고립감과 불안을 느끼고, 그에 대한 보상을 인간이 아닌 기계나 미디어에서 찾는 것이다.

“공격수나 공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골키퍼만 바라보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죠.” 하고 블로흐는 말했다. “공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정말 부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중략) 말하자면, 누군가가 문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가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문손잡이를 보는 격이기 때문이다.(본문 119쪽)

축구 경기 내내 골키퍼를 보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관중은 공을 차는 공격수나 공에 관심을 집중한다. 사실상 득점은 골대에서 이루어지기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두가 골키퍼를 쳐다보게 되지만 관심은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관중들은 공이 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골키퍼는 다시 긴 시간 동안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채 경기를 계속해야 한다. 모든 관중이 공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페널티킥을 맞은 골키퍼는 공도 없이 이리저리 몸을 날린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처럼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정체성을 상실하고 소외된 채 문손잡이로 전락한 인간이 내보이는 불안의 단면들은 씁쓸하고 서글픈 웃음을 유발한다. 이는 작가가 문학적 낭만으로 덮지 않은 진실의 어두운 서정이다.

범죄소설의 형식을 뒤엎고 인물과 독자의 불안을 일치시키는 역설적 범죄소설

범죄소설이라고 하면, 으레 사건이 발생하는 경위가 설명되고 범쯁자와 추격자 사이에 쫓고 쫓기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며 결국 사건이 해결되어 어떤 결과가 도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살인을 저지르고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주인공을 다룬다는 점에서 범죄소설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도 일반적인 범죄소설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이는 한트케가 소설의 전통적 관습을 부정하고 새로운 수법을 시도한 프랑스의 문학 사조인 누보로망의 영향 아래 있음을 보여 준다. 납득할 만한 사건의 인과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블로흐의 강박적인 이상행동과 인물들의 소통 불가로 인한 불안감은 고조되지만 사건 자체가 야기하는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소설이 전개될수록 살인 사건 자체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이야기는 종결, 미결이 아니라, 사건과 전혀 무관한 곳에서 엉뚱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작품은 이렇게 범죄소설이면서 범죄소설의 형식에 철저히 반하는 방식으로 역설적인 효과를 끌어낸다.
주인공 블로흐가 자신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으며 한 번씩 의식적으로 상기시키지 않으면 잊어버릴 정도로, 소설 속에서 살인 사건이 차지하는 자리는 희미하다.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도 자신이 살해한 여자 옆에서 태연히 잠을 자는가 하면 도주 중임을 거의 망각한 채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른 사건에 더 관심을 갖고 몰입한다. 그가 잔악하고 대담한 살인마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블로흐는 분명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불안과 강박에 시달린다. 다만 존재감과 정체성을 상실하여 자신이 느끼는 불안과 자기 행위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수시로 떠올리는 영화 속 장면이나 신문의 다른 기사들처럼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위 역시도 타자화하며 행위의 주체인 자신을 스스로 소외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존재와 행위로부터 철저하게 유리된 블로흐는 자기와 무관한 사람이 잃어버린 목걸이를 찾는 데 열을 올리고, 쫓기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피해야 할 경찰이나 세관원에게 벙어리 학생의 실종 사건에 대해 열심히 묻고 다닌다. 엉뚱한 곳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소설은 살인이라는 굵직한 사건이 아니라, 인물에 내재한 소외와 불안의 심상을 따라 무질서하게 펼쳐진다. 정황에 맞지 않는 언행, 무의미한 단어들의 나열, 맥락 없는 대화 속 극단적인 말놀이와 농담, 급작스럽게 등장하는 뜻 모를 기호들은 블로흐가 느끼는 불안과 강박을 작품 전체와 일치시키며 매순간 이를 받아들이는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고,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어긋나 흐르는 이야기 전개는 독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예의 범죄소설이 일종의 충격에서 팽팽한 긴장을 지나 안도감으로 마무리된다면, 이 작품은 시종일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같은 의심과 불안 가운데 독자를 버려 둔 채 허탈하게 끝나 버린다.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 역시 소설을 통해 작가와 소통하지 못하고 소외와 단절, 불안과 강박을 느끼는 또 한 명의 블로흐임을 서늘하게 비춰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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